드라마, 영화, 책

책 [죽음을 원할 자유], 영화 [씨 인사이드], 연극 [잘자요 엄마]

아르미다a 2014. 11. 30. 16:57

 

 

 

SBS뉴스 [취재패일] 안락사,존엄사를 둘러싼 논쟁 ㅡ 살권리 죽을권리 선택할권리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919796&plink=OLDURL

 

 

 

 

 얼마전 텔레비젼을 보다가 "tv, 책을보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죽음을 원할 자유] 라는 책을 만났다.

연명치료에 반대개념인 완화치료를 담당하는 큰병원 의사도 패널로 나왔으며, 주된 이야기는 존엄사 즉, 소극적 안락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의학의 발달이 침해하게 된 죽음과 관련된 인권에 관한 대담들이 이어졌다.

 

 수년전 EBS 에서 방영해주어 만나게된 [씨 인사이드] 라는 스페인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위 책과는 비슷할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무려 26년 전부터 전신마비 환자로 살았다.

강력한 마약 진통제 투약이 필요한것이 아닌, 그러니까 물리적인 극도의 통증, 육체적 고통이 수반되는것이 아니라는것이 차이점이다.

 

 소극적 안락사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인식이 확산되어있다. (여전히 그런 발상자체를 불경시하는 견해와 관점이 강하게 드러나기도 하는 현실이지만) 과잉치료, 연명치료에 대한 반정서가 우세하다. 그리하여 21세기 들어 유럽을 중심으로 상당히 합법화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호스피스 환자에게는 DNR(Do Not Resuscitate) 서명을 받는다.

 평균수명이 연장되어 고령인구수가 워낙 많아지고 있고, DNR 뿐만 아니라 무의미한 항암치료를 거부하는 정도의 최소한의 좁은 범위 내에서의 선택은 사회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차선책이 아닌 차악책으로서의 마지막 구명줄일테니까.

 

 '생명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죽음은 신만이 주관하는것이니 인간(따위가)이 (감히) 결정해서는 안된다, 자살은 교만이며 나약함이다'

등의 주장들... 얼마나 무례한 단정이며 오만한 침해인가. 짐승만도 못한 삶일지라도 너의 십자가이니 겸손히 받아들여 끝까지 지고가라는 강요. 옳은가?

 

 

 유럽에서 조차 사회적 합의가 여전히 이루어지기 힘든 문제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적극적 안락사, 즉 또 다른 존엄사이다.

 프랑스와즈 사강이 "타인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면 나는 나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항변한 것이 떠오른다.

 영화 속 전신마비의 경우와 같이, 극단적 신체통증이 수반되지 않는 삶이라면 어떤가. 물리적통증은 무겁고 정신적 피폐함은 하찮은가??

희망고문으로 임계점까지 버텨보다 그 불타는 인내심이 바닥나서 마지막의 선택지, 마지막 탈출구로서의 [죽음을 앞당기는것]이라는 구명줄을 잡는다면, 그저 비난받아 마땅한 도피인가. 

 도저히 의미없는, 스스로 살아있는 송장이라고밖에 느껴지지않는 여생을 잘라낼 권리가 당사자에게 주어질수있는가. 그런 삶을 짧게 디자인할 자유를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누리겠다는 주장을 받아들일수 있을까. 유무형의 사회적 장치로서 그것을 통제하는것은 어느선까지 옳은가.

 

(훨씬 더 나아간 얘기지만 -말기암뿐만이 아니라-치매와 관련된 뉴스기사에서 자신이 치매에 걸린다면 안락사하고 싶다는 식의 댓글들이 베플에 오르는것을 본다.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뇌기능이다. 감정과 사랑, 영혼도 심장이 아닌 뇌에 머물러있겠지. 그 대뇌부분이 비가역적인 손상으로, 기능결함으로 가망없는 지경으로 망가졌다면, 그렇게 파충류뇌만 작동하는채로 연명하기 싫다는 사람의 멈추고자 하는 갈망을 만류하는것이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할 사람된 도리인걸까.)

 

 우리가 살면서 짊어진것들은, 특히 존재를 특정하는 주요 항목들은 선택하지 않은것, 그저 주어진것이 더 많다. 태어나는 순간 이미, 내 초기존재의 사회적 그리고 유전조합의 구성요소는 이미 세팅되어있다.

 죽음의 경우는 어떤가. 삶과 죽음이 다른것이 아니며 죽음또한 한 인생의 아주 중요하고 큰 부분이다. 인생의 굵직한것들 중 개인이 직접 신중히 디자인하고 스스로 선택할수 있는 몇 안되는 것 중 최후의 선택지인 죽음. 인간은 자유와 권리로서 그것, 죽음이라는 것을 결정하고 선택할수 있는가.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으로 상위가치 1순위이기 때문에 이를테면 '지구와 인류를 구하는정도'가 아니고서야 개인선택으로 단축시키면 안된다거나, 개인의 생명이라도 개인에 귀속됨이 아닌 절대적 존재인 신의 소유이므로 감히 끼어들면 안된다는 명제가 순리이며 지혜인것일까.

 

 인권이란. 존엄사를 두고 무엇이 진정 인권인지에 대한 견해는 상반되어있다. 

 수만년 인류 전체의 역사에서보면 "인권" 이라는것은 워낙 최근에 튀어나온 생소한 발상일것이다. 200년이나 되었을까? 인권이라는게 제대로 정의된것은 더더욱 얼마 되지않았다. 그 무엇보다도 신성불가침한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개인의 인권이다.

 100년쯤 후 에나 가능할까. '인권'의 장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최후에 뿌리내릴 항목은 죽음에의 결정권이 아닐까 한다.

 나는 그것을 감히 "가장 고차원적인 인권" 이라고 믿는다.

 

 

 

 

 

p.s. 퓰리처상 수상 원작의 연극 '잘자요, 엄마' 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은 삶을 찜통같은 만원버스에 대입해 이야기한다. 몇 정류장을 더 가더라도 결국 마찬가지인 답답한 버스안에서 종점까지 무의미하게 참지않겠다며, 이만하면 충분하다싶을때 내릴 정거장을 스스로 기꺼이 결정하겠다는 신중한 의지가 인상깊다.

 이 작품에서 집중조명하는 주제는 죽는다는것이 아닌데다, 그 소재는 존엄사가 아닌 엄연한 자살이다. 소극적 안락사에 관한 책을 적극적 안락사에 관한 영화와 함께 묶은것도 모자라 이 연극에까지 의미확장한다는것이 소극적 안락사라는 마지노선까지도 희석시키는게 아닌가 적절치 못할수도있겠다. 극단적이지만 그래도 인권이라는 측면에서는 상통하는 메세지를 담고있다.

 “나 자살할거야, 엄마” 마샤노만의 연극 <잘자요, 엄마>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4585§ion=sc7§io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