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베르디의 아주체나, 비극중의 비극

아르미다a 2011. 10. 15. 12:36

 베르디의 3대 작품이라고하면 라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일트로바토레 를 꼽는다. 모두 베르디의 중기 작품이다.

 

오페라 세리아에서 보여주는 죽음은 치정에서 비롯한 살인이나 병으로 죽는 여인, 또는 자결하는 여인 정도로 정형화되어있다.

(종종 공권력에 의한 처형도 있긴 하다)  : 이런 죽음들은 기본적으로 낭만성을 띄고 있어 작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베르디가 만든 리골레토나 일트로바토레에서 보여지는 죽음은 다른 작품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이하고도 끔찍한 유형이다.

바로 (복수에 눈먼 실수에서 비롯된) "부모에 의한 자식의 살해" 다.

 

 근대 이전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는 경우와 메데아에서 악녀로 그려지는 여주인공이 복수의 수단으로 자신의 아기를 죽이는 작품이 있지만,  혈연을 죽이는 비극은 낭만주의 시대의 다른 장르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벨리니는 메데아에서 차용한 노르마를 만들때 노르마가 아이를 차마 죽이지 못하는 것으로 내용을 수정한다. 일트로바토레에서는 자식이 하나도 아닌 둘이나 죽임을 당하고 게다가 (알지못한채)형이 동생을 죽인다.

 

 

  <일 트로바토레 Il trovatore>

            루나 백작 역의 베이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  ↑

 

 

 

 메트오페라를 만날때마다 항상 느끼는거지만, 자본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연출이 확실히 미국적이다. 헐리우드 영화가 그러하는 것처럼 세부 연출은 다소 자극적이기도 하고 항상 대단한 스케일로 관객을 만족시킨다. 메트오페라 실황을 대대적으로 판매하기로 한후부터 더욱 그러한듯 하다.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베이스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이 이름은 발음은 물론이고 쓰는것도 너무 어렵다). 그의 무게감과 실력과 음색의 카리스마를 그의 아름다운 은발이 완성시킨다. 은발의 호랑이가 무대위로 등장하는 순간마다 관객의 몰입정도는 치솟는다.

 

 이 오페라의 제목은 하마터면 '아주체나' 일뻔했다. 내용을 보면 수긍이간다. 아주체나가 주인공이 맞다. 하지만 오페라의 공식과 흥행여부를 염두해서였을까, 결국 '일트로바토레'-음유시인, 극중의 만리코-라는 더 적절한 제목이 붙여졌다.

 아주체나는 백합이라는 뜻이다. 언뜻 전혀 어울리지 않는 꽃이름을 왜 집시여인에게 붙인걸까. 천사같은 느낌의 이름과 이 집시여자가 극도로 모순적이며 대비되듯이, 일트로바토레 역시 끔찍한 비극의 이야기와는 지극히 모순되며 대비되는 더없이 아름다운 선율들로 가득찬다.

 감옥에서 아주체나, 레오노라, 만리코가 부르는 3중창은 리골레토의 4중창 만큼이나 아름답고, 레오노라가 죽기전 만리코의 품안에서 부르는 아리아는 라트라비아타에서 비올레타가 죽기전 알프레도의 품안에서 부르는 아리아처럼 애처롭다.

 

 인간에게 부여할수있는(신화에서가 아니라)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는 자식의 죽음이다. 극으로 만들려면 한층더 비극성을 입혀야 하므로 부모 스스로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하도록 설정한다. 아버지에게는 꽃봉오리같은 순결한 딸의 죽음을(리골레토), 어머니에게는 태어난지 오래되지않은 작고 약한 아가의 죽음을(일트로바토레) 장치한 베르디. 밝고 가벼운 희가극속에는 도저히 그의 위대한 음악의 진지함과 깊이있는 무게감을 녹여낼수 없었다. 우리에게 오래도록 감동을 주는 심오한, 그리고 크고 오래가는 울림은 그렇게 태어난다.

 

 추하고 멸시받는 광대 리골레토가 어여뿐 딸을 보며 삶을 감당할수 있었던 것처럼, 아주체나는 만리코를 키우며 하루하루는 버텼을 것이다. 어머니의 화형으로 떨리는 가슴을 추스를 새도 없이 제손으로 제아이를 불에 던졌다는 충격을 맞닥드린 순간, 그녀의 품에는 만리코가 안겨있었다. 그 순간부터 아주체나의 아가는 만리코였다. 극중에서 아주체나는 만리코를 부를때마다 '만리코, 내아들' 이라며 '내아들'이라 칭하기를 빼먹지않는다. '내아들'이니까. 만리코에게 극진한 사랑을 대신 쏟아부으며 아주체나는 처참함을 딛고 살아낼 힘을 얻었다. 전투로 죽을뻔했지만 극진한 간호로 살려낸 아들이고, 그녀가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땐 류트연주와 노래(레오노라를 사로잡아 이방인을 사랑케한)로 평안을 주던 아들이다. 아주체나는 마지막에 루나백작에게 외친다. ㅡ니가 죽인것은 니동생이다.. 그리고 절규한다. ㅡ나는 복수를 완성했다..

 이야기의 초반에 벌어진 최악의 비극-아이의 죽음-은 만리코의 죽음으로 다시금 완성된다. 이제 아주체나의 아이는 진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