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톨릭

진리, 자유 그리고 현각스님

아르미다a 2010. 12. 17. 23:03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 8,32)

 

 신앙의 핵심인 '구원'이 무엇일까.

구원하다 -> 구하다 -> 해방시키다 -> 자유롭게하다.

자유를 준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까.

죄로부터의 자유, 다시말해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진리는 우리를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준다.

그래서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모두들 진리를 갈구한다(목말라하며 쫓는다). 진정 자유롭기위해서.

 '진리'라는 거창한 말대신, 역사를 보면 언제나 사람들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쳐싸웠다.

 

 이토록 인간영혼에 자유가 필수적이었기에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자유의지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으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진리안에서 자유의지를 지배하는 지혜를 오직 주님안에서 얻어 진정 자유케된다.

 

 나를 부자유케하는 그 고통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게되며 

동시에 진리가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TV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폴 뮌젠('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의 저자)이라는 인물을 만났다. 진리를 위해 열심히 방황하던 미국 엘리트 청년 폴뮌젠은 결국 자신이 원하던 진리를 만나 현각스님으로 정착했다.

 외로운 철학자 폴뮌젠, 아니 현각스님. 초월주의 사상도 키에르케고르도 쇼펜하우어도 그의 고뇌를 어쩌지 못했다.

 7년전에 쓴 책 표지의 엘리트 청년의 샤프한 얼굴대신 지금의 그는 나이살이 조금 붙은 중후한 중년의 얼굴과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이 인간을 철학자로 만드는가. 외로움과 공허함 이다.

그래서 외로움은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주며, 쓸쓸함은 삶의 경건함을 느끼게 해준다고 했던가.

 사랑이 충만한 인간은 굳이 의식적으로 철학하며 고뇌치 않는다. 그런 이들은 구태여 실존적 문제와 씨름하며 고통받을 필요가 없다.

 

 청년 폴뮌젠(지금의 중년의 현각스님이 아닌)의 진리에 대한 사색과 고뇌가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는 (사마리아여인이 목마르지않은 샘물을 갈구하듯) 자유케하는 진리를 갈구하며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서양철학의 한계에 염증을 느낀 이 외로운 사색가를 결국 만족시킨 그 길이 무엇인지, 이제 신념의 뿌리를 내려 안정된 그의 머리속이 궁금해졌다.

 지적호기심으로 설레이며 인터넷으로 그의 금강경 강의를 봤다.

그야말로 퓨전요리를 맛보는 기분. 한국인의 입맛에 맛게 개량되고 수정되어 사랑받는 치즈처럼,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색을 입혀 풀어내는 그의 세련된 발설들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명료했다. 

 동양철학에 심취해 환희에 젖어있는 그의 하드웨어는 서양철학이었다. 불교사상을 순수철학의 매력으로 승화시킨 현각스님.

 중간중간 기독교의 사상 아니, 예수님의 가르침이 함께 농도깊게 녹아있었다.

 

 

 예수께서는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요한 18, 37-38)

 

  진리를 만나러, 자유를 더 깊이 느끼러...  

 행복을 찾아해매다 가까이에 파랑새가 있음을 알았듯, 진리의 파랑새, 자유의 파랑새가 이미 내게 주어져있음을 선명히 느끼기위해...

 

 폴 뮌젠이 카톨릭안에서 진리를 만나지 못했음은 그가 너무 '잘나서' 였던것같다. 진리를 만나지 못했던게 아니라 독트린에 쌓인, 카톨릭 도그마내에서 바라본 그 진리가 맘에 안들었던것이다. 그가 자아를 초탈하여 행복하며 환희에 쌓여있다고 하나, 그의 자아가 너무 강했기에 '절대자 신'안에서의 자유는 입맛에 안맞았던것이다.

 폴 뮌젠. 스스로 성불하는 진리의 자유에 안착한 외로운 인간. '공'함을 껴안은, 끊임없이 비우는 사색가.

 

 


 

 여러분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요한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