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영화, 책

Milan Kundera

아르미다a 2009. 6. 10. 12:47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고3때 "이방인"을 그렇게 읽었듯, 이 책도 연이어 두번을 읽었다.

 "이방인"때문에 까뮈의 "전락"을 찾아 읽었던것처럼 그렇게

이 책 때문에 쿤데라의 다른 작품인 "느림"을 찾아 읽었다.

 

 까뮈가 "이방인"이후 10년이 훨씬 지나 쓴 "전락" 처럼

쿤데라가  이 책 이후 10년이 훨씬 지나 쓴 "느림".

 이방인과 전락의 관계처럼 이 책과 느림의 관계가 유사하다.

10년도 더 전에 쓴 책에 녹아있는 작가의 말속의 말을 좀 더 이해할수있게 해준다.

 

 까뮈는 30대의 나이에, 2차대전의 '시대에' 이방인을 썼고,

쿤데라는 50대에, 프라하의 봄 사건을 '배경으로' 이 책을 썼다.

 

 실존사상은 격한 시대적 상황하에서 더 쉽게 떠오르는걸까.

실존을.. 자유에 대입해 상상(?)해본다.

20세기 자유의 억압하에 명료히 그림그려지는 자유를 꿈꿨다면,

어쩌면 구체적 억압이 없는 21세기, 미지의 자유를 꿈꾸며 동시에, 그 진정한 본연의 자유의 모습을 정의하려고 발버둥친다. 

 


 

 느림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 우리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위해 속도에 악마에 탐닉하는 것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것, 기다려왔던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직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

.... 우연은 필연성과는 달리 이런 주술적 힘을 지닌다.

 

 그가 테레사에게 떠밀려 간 것은 우연의 연속에 의한 것이고, 그 우연은 빠져나갈 길없는 새장속으로 그를 몰고 갔다.

 그의 인생에서 위대한 필연성,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직업이었다. 그가 의학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나 합리적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욕구에 따른것이었다.

 

 현기증, 그것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과는 다른 우리 발밑에서 우리를 유혹하고 홀리는 공허의 목소리, 공포에 질린 나머지 아무리 자제해도 어쩔수 없이 끌리는 추락에 대한 욕망이다.


 현기증을 느낀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허약함에 도취되는 것이다. ... 자신의 허약함을 의식하고 그것에 저항하기보다는 투항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허약함에 취해 더욱 허약해지고 싶어하며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백주대로에서 쓰러지고 땅바닥에, 땅바닥보다 더 낮게 가라앉고 싶은 것이다.

 

  여자라는 것, 사비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하나의 조건이다. 선택의 결과가 아닌 것은 장점이나 실패로 간주될수 없는 것이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것이다. 그들의 어휘는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 두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속에 녹아들었을수도 있었을텐데. 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아닌 인간존재가 상상하지못하는 부분에 숨겨져있다. 인간은 모든 존재에 있어서 동일한것, 자신에게 공통적인 것만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개별적 <자아>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고 따라서 미리 짐작도 계산도 할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베일을 벗기고 발견하고 타인으로부터 쟁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녀가 한말을 슬픈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들은 행복했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슬픔을 무릎쓰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슬픔덕분에 그러했던 것이다.


 공포는 하나의 충격, 완벽한 맹목의 순간이다. 공포에는 모든 아름다움의 흔적이 결핍되있다. 오로지 자기가 기대하고 있는 미지의 사건이 내뿜는 광폭한 빛만 보일따름이다.

 이와 반대로 슬픔이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상정한다. ....

 공포의 관채는 휘장에 가려지고 전보다 세상을 훨씬 아름답게 만드는 푸르스름하고 부드러운빛속에서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 그녀는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이란 우리는 마지막역에 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는 함께있다라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이 책이 한편으론 더 어렵고 난해하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쿤데라는 까뮈보다 훨씬더 친절하고 장황하리만큼 자상하게도,

깊숙히 껴안아봄직한 과제들을 내보여주고 부연설명해놓았다.

 

 까뮈의 간결하기 그지없는 이방인에서의 강렬한 충격은 아니지만,

상당히 진동이 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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