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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아르미다a 2009. 6. 17. 14:29

나른함과 달콤함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이 낯선 감정들을 슬픔이라고 하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지 나는 망설인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자기 자신에게만 구애되는 이기적인 감정이며, 나는 그것을 매우 부끄러워하고 있다. 더구나 내게있어 슬픔이란 언제나 고상한 것으로 비춰지고 있었으니만큼.

 

...............................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나는 문득 그때 자신이 하나의 관념적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기에 감수성이 예민한 인간을 공격했음을 깨달았다. 
 그녀 역시 얼마간은 수줍은 작은 계집애였으리라. 그런 다음 소녀 가 되고 여인이 되었다. 그녀는 마흔 살이었다. 그리고 고독했었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와  더불어 10년, 혹은 20년을 행복하게 지내려고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 

 

 다만 내가 침대 속에 있을 때, 자동차 소리만 들리는 파리의 새벽녘 나의 기억이 이따금 나를 배신한다.

 다시 여름이 다가온다. 그 추억과 더불어.

 안느, 안느! 나는 이 이름을 낮은 목소리로 오랫동안 어둠속에서 되풀이한다.

 그러자 무엇인가 내 마음 속에 솟아나고, 나는 그것을 눈감은 채 그 이름으로 맞이한다.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

 

 

 

 


 

 슬픔이여 안녕, 고등학교 1학년때인가 너무나 인상깊게 읽었던 소설.

 전후세대 작가인 프랑스와 사강이 19살(18세?)때인가 대학을 중퇴하고 3주만에(2주?) 완성한, 당시 상당히 센세이셔널했다던 작품이다.

 

 한글제목이 '슬픔이여 안녕' 이었기에, '슬픔'과 작별을 고하는, '슬픔'을 떠나보내는 '안녕' 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다.

 나역시 그랬다. '안녕? 슬픔아' 뭐 이런 제목이었다면 '안녕'이 맞이하는 '안녕' 이라는걸 눈치챘을텐데.

 

 세실은 이렇게 슬픔을 회피하거나 누르지않고 정면으로 맞이하므로써 죄책감 따위로 고통받는대신 건강한 어른이 된다.

 

 소설을 읽을당시 여고생이었던 나는 안느가 사고를 위장해 자살한 면모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고상하고 지적인 여인인 안느. 죽음까지도 우아한 배려심이 담겨있구나...

 

 지금은 다시 알겠다. 안느가 그렇게 죽은건 배려심때문이 아닌 '자존심' 때문이라는것. 사고로 보이고 싶은 자존심.. 자살은 너무 나약하고 초라한 결말이니까.

 안느는 세실 부녀가 자유로운 성향이라는걸 충분히 알고 있었을것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이 더 깊은 행복을 주지 못하는걸 알기에 자신의 세상으로 데려오려고 그렇게 도와주려했던것이다.

 안느는 세실과 자신의 약혼자가 상당히 친밀한 부녀라는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때문에 조금은 그 딸이 불편해한다는것도, 안느에게 절망감을 준 옛애인 엘자의 등장을, 세실이 적극주도 까진 아니더라도 반가워했을꺼라는 짐작 정도는 했을것이다.

 안느는 의붓딸이 될 세실에게 따뜻하게 다가가보지만 세실은 그런 소통의 시도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결국 관념적 존재가 아닌, 살아있는 감수성이 예민한 존재인 안느는 세실이 예상했던 "다소 냉철하고 단단한 어른"의 모습이아닌 "상처받은 여린 여성"의 면모를 내비치고 가버린다.

 

 1950년대 프랑스가 어땠는지 알수 없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어낸 사회 가치관의 혼란과 한참 유행하던 실존주의 또한 지겨워지기 시작했을것이라는 짐작은 된다.

 프랑스와 사강은 마약과 관련되어 기소된 법원에서 "인간은 인간을 파괴시킬 권리도 있다"라는 발언을 했다고도 한다.

 그 말처럼 그녀의 소설속 안느는 "자신의 생을 종식시킬 권리"를 행사했던것일까. '자살' 역시 신이 주신 선물, '자유의지'의 한부분이었을까. 마치 선악과처럼...

 신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이브가 선악과를 취할수 있게 하신것처럼, 스스로 삶은 마감하지 않길 바라면서도  안느가 그렇게 할수 있는 선택권을 준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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