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영화, 책

불의 검 vs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아르미다a 2010. 9. 22. 21:11
 
사랑,

비약적 감상 vs 분석적 철학

 

 

 

 

 

 

불의 검, 거짓말 조금 보태면 20년만에 보는 만화책.

 

 '나는 안울어 캔디'형 아라와 모든 여자들의 다채롭고 까다로운 로망까지 모두 채워줄만한 완벽남 산마로를 주연으로,

 등장인물들중 가장 순수한 영혼의 예술가인 바리와, 비련의 여인같은 티없이 오직 선한 소서노를 빛나는 조연으로 진행된다.

 

 작가 김혜린의 이야기 구성력, 한자어, 순우리말, 고어들의 풍성한 어휘력, 시를 써내려가는듯한 문장력,

여학생들을 홀릴만한 감성이입들이 훌륭하다고 평해볼까~

 

 지나치게 과장된 감정표현, 극도로 비약적인 주인공들의 감성...

 비현실적이지만 이상화된 완벽한(인간적인 나약한 약점까지 아주 적당할만큼 포함된) 캐릭터들.

 

==> 이미 연애라는것을 해본 서른즈음의 어른으로서 이 책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정서적인 다시태어남(?)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잠시잠깐 사춘기소녀로 돌아가는, 영화나 문학책으로는 얻기 힘든 수위의 일상탈출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

 

 

 

 알랭드보통의 처녀작. 철학조각들을 연애에 빗대 쉽게 풀어쓴 책이랄까.

 남녀간의 사랑을 공리주의자들의 사랑이라 표현한것에 공감~

 나도 드보통의 인용처럼 노른자가 샐 걱정없는 토스트가 있었으면 좋겠다.... ^^

 

 그렇다. 우리의 연인은 객관적으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수많은 여우중의 한마리, 장미꽃밭 속의 한송이일 뿐이지만,

다만 우리가 그들에 들인 시간때문이며, 서로 길들여졌기 때문에 그냥 금발머리 꼬마 하나가 장미와 여우에겐 '어린왕자'가

될수있는것이다. 그 이름을 불러주어 그때서야 '꽃'이 되는 것처럼.

 백마탄 왕자님은 당연히 없다. 개구리와 사랑에 빠진후 키스를 하면 그 개구리가 비로소 왕자님으로 변할뿐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saays in Love ㅡ 알랭 드 보통) 의 본문 中 에서

 

 

 

 사랑에는 중간이 없다. 사랑은 단순히 방향일 뿐이며, 바라는 것을 붙잡고 나면 그 이상 바랄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랑은 충족이 되면 스스로 타 사라지고, 욕망의 대상을 소유하면 욕망은 꺼진다.

 클로이와 나는 바로 그러한 마르크스적인 나선의 덫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사랑 내부의 관점에서는 삶의 우연적 성격을 목적성이라는 베일 뒤로 감춘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운명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현재를 살지 못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갈망해온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깨달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가 살 수 있는 단 한 번의 삶[천국의 개입은 논외로 하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가하는 사람(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우리는 곧 그 사람을 잊어버린다)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똑같은 요구를 공유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마음이 끌리는 상태의 핵심에 그 요구가 놓여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 매우 온전해 보이고 - 육체적으로 온전하고 감정적으로 "통합되어" 보이고 -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하게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인 평범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그 광기를 드러낸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오아시스 콤플렉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왕자나 공주라는 환각을 만들어낸다.